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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스테리아 @정동현

2018년 4월 18일 — 0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처럼 차갑고 무심한 선율이 흐르는 도시였다.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빌딩은 엄숙했고 몇 백 년 역사를 품은 좁은 도로는 과묵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흑백의 선율로 몸을 감싸고 날렵하게 걸었다. 밀라노. 이 도시의 깊은 골목, 좁은 문 안에 예민하고 세련된 사람들을 위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랑고스테리아Langosteria. 파란 눈을 한 옛 귀족들처럼 굴 껍데기를 칼로 뜯고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먹었다.

text 정동현 — illustration 왕조현

밀라노로 가는 항공편은 만석이었다. 며칠 전 여행사 직원은 전화로 “지금 빨리 하셔야 한다”며 재촉했다. 구태의연한 영업 멘트가 아니었다. 그 주는 밀라노 패션 위크였다. 며칠 전 동료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쯤 패션 위크 아닌가? 호텔 잡기 힘들 텐데.” 그의 말은 옳았다. 평소보다 호텔 값이 뛰었고 항공권은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으레 있는, 내가 세차를 하면 비가 오고, 내가 어떤 팀을 응원하면 꼭 그 팀이 지고 마는 흔한 머피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인 필연이었다. 그제야 나는 탑승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군상을 살펴봤다. 비즈니스 클래스 쪽에는 한눈에도 청담동 실장님처럼 검정 옷에 진한 화장을 한 중년 남녀가 모여 있었고 내가 서 있던 이코노미 클래스 쪽에는 질끈 동여맨 머리를 하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서류 뭉치를 들고 쉴 새 없이 전화를 하는 남녀(특히 여자들)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0시간 동안 내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는 비행시간 내내 독서등을 켜놓고 화장을 고치듯 몽클레어 로고가 찍힌 서류를 꼼꼼히 체크했다. 그 서류 점검이 끝났을 때 비행기는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라는 밀라노 거리에서 글자와 소리를 지운다면 잿빛 런던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넘기고 짙은 색 코트에 자줏빛 스카프를 한 남자와 하이힐에 화려한 숄을 걸친 여자, 어두운 빛의 하늘과 대비되는 파란 눈동자,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들이 긴 저녁 시간을 보내며 밀어蜜語를 주고받는 곳이 이 도시 어느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단서를 하나 들고 호텔 컨시어지에게 갔다. 나만 한 키에 금발이었던 컨시어지는 레스토랑 이름이 적힌 쪽지를 보더니 수학 문제를 앞에 둔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마우스 커서를 까딱하더니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말다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의하는 것인지 모를 격렬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이윽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그녀는 단호한 몸놀림으로 메모를 적어 내려갔다. 그녀는 “딱 한 자리 남은 테이블을 구했다”고 말하며 예약 시간과 주소를 적었다. 그 레스토랑의 이름은 ‘랑고스테리아Langosteria’였다. 그날은 패션 위크 마지막 날이었다. 온 도시가 큰 행사를 치른 시원섭섭한 감정에 휩싸인 것 같았다. 안개비가 내리는 축축한 밤공기 속에서 우버를 잡아탔다. 작은 간판을 지나치는 일은 쉬웠다. 우버 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하단 몸짓으로 우리를 내려줬다. 한 폭도 안 될 만한 인도를 조금 걸어 올라갔다. ‘랑고스테리아’라는 빨간 글씨가 검정 철판에 박혀 있었다. 두터운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두꺼운 껍데기가 달린 굴, 관운장의 언월도마냥 큰 집게발을 가진 대게, 까만 눈이 달린 심해 가재의 일종인 랑구스틴, 반짝거리는 비늘과 맑은 눈을 가진 큰 생선들이 얼음에 박혀 빛을 발했다. 그 뒤로는 요리사들이 작은 모자를 쓰고 해산물을 다듬었다. 이탈리아식으로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웨이터가 예약을 확인했다. 자리는 진열 선반 뒤쪽이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본 밝은 은하수처럼,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자리에 앉으니 은근한 도취감이 밀려왔다. 우선 와인 메뉴부터 살펴봤다. 별처럼 반짝이는 빛이 그리웠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시작은 샴페인이 아닌 이탈리아의 전통 발포주 프로세코로 시작하는 것이 옳았다. 그중에서도 밀라노에서 70km 떨어진 프란차코르타Franciacorta산産 프로세코를 골랐다. 프랑스 샴페인에 비해 20분의 1밖에 안 되는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프란차코르타의 스파클링 와인의 명성은 21세기 들어 급속히 애호가 사이에 퍼져 나갔다. 빙하 시대에 형성된 자갈, 모래 등으로 이루어진 토질, 온화한 기후 등으로 인해 스파클링 제조에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여기에 프란차코르타 와인 컨소시엄Consortium의 활발하고 엄격한 규제로 지역 전체의 품질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고른 한 병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옥타브 높은 경쾌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 같은 산미, 그 아삭거리는 맛 뒤로 조용히 배경처럼 퍼지는 빵을 닮은 발효 향, 군더더기 없이 날씬하게 떨어지는 끝 맛,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은 풍성한 향에 한 모금을 마시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른 목을 축이고 이탈리아 특유의 싱거운 빵을 씹었다. 본격적인 메뉴 탐색을 시작했다. 굴만 해도 10종류가 넘고, 이외에 대게, 조개 등 고를 수 있는 해산물 종류가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럴 때는 한국식으로 ‘해산물 모둠’인 ‘Plateau Royal’을 시키는 편이 후회가 없다. 메뉴를 치운 뒤 웨이터가 프로슈토 햄이 올라간 강낭콩 수프를 전채로 내왔다. 짭짤하게 간이 된 수프를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위장이 조금씩 예열되는 느낌이었다. 본격적인 경주가 시작됐다. 삼단의 철제 받침 위로 접시가 하나씩 쌓였다. 웨이터는 치열한 전투의 전리품을 내놓는 것처럼 신중하게 접시를 올려놓았다. 접시를 볼 때마다 희귀한 보석을 본 듯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맨 밑에는 해산물을 찍어 먹을 버터, 마늘 풍미가 진한 아이올리, 한 변의 길이가 2mm인 브루누아즈Brunoise 사이즈로 자른 셜롯을 화이트 와인 식초와 함께 올린 미뇨네트 소스Mignonette Sauce 총 3종이 큰 그릇에 담겨 놓였다. 2층에 놓일 접시가 나타났다. 각종 굴과 새우, 고둥, 대합, 조개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할 새도 없이 다음 접시가 제일 높은 곳에 놓였다. 팔뚝만 한 랍스터 한 마리가 반으로 쪼개져 올라왔고 그 옆에 깃발처럼 큰 대게의 두 다리가 얼음에 꽂혀 있었다. 부산에서 자란지라 해산물이라면 흔하게 먹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맛본 해산물은 달랐다. 비린 맛이 전혀 없는 선도는 기본이었다. 선도를 바탕으로 먼지 티끌 하나 섞이지 않도록 깔끔하게 재료를 다듬고 조리한 맛이 느껴졌다. 어설프고 무성의한 태도가 없었다. 대신 줄자를 들고 몸의 치수를 재고 옷을 재단하듯 일관된 절차와 기준, 숙련된 기술로 벼려진 날카롭고 반짝이는 맛이 있었다. 접시를 앞에 두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이프와 포크로 굴을 돌 같은 껍데기에서 떼어내고 대게의 두꺼운 옷을 찔러 벗겼다. 로마 시대 귀족처럼 한쪽에 먹고 남은 껍질이 수북이 쌓였다. 레몬즙, 올리브유, 버터, 아이올리 등 소스를 바꿔가며 맛을 봤다. 첫 번째 요리가 끝나고 파스타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오징어, 바지락을 토마토 오일 소스에 볶아 버무린 링귀네였다. 파스타의 익힘 정도는 당연히 완벽했다. 툭툭 짜내 볶은 것 같은 토마토는 그 작은 몸에서 큰 맛을 뽑아냈다. 파스타를 깨끗이 비우고 나니 메인 요리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메인은 그날그날 들어오는 생선으로 조리를 해주는 ‘catch of the day’ 메뉴였다. 웨이터의 추천을 받은 생선은 빨간 성대(Red gurnard)였다. 바다 바닥을 지느러미로 기어다니는 특이한 물고기로 지중해에서 흔히 잡히는 녀석이다. 주문을 할 때 웨이터는 접시를 튀어나올 정도로 큰 이 녀석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두 번째 메뉴를 해치우는 사이 토마토, 올리브유, 당근, 셀러리와 같은 간단한 재료와 생선과 함께 봉투에 넣어 찐 요리가 완성되었다. 웨이터는 익힌 생선을 보여주고 뒤로 가져가 해체한 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단순한 요리였다. 하지만 뜻이 명확하고 간결한 단문單文처럼 그 단순함 속에 이탈리아의 바다와 육지가 모두 담긴 것 같았다. 이탈리아 요리의 지향점도 그 한 접시에 있었다. 그들의 거침없는 의사 표현처럼, 그러나 익숙한 웃음처럼, 토마토의 감칠맛과 생선 살의 담담한 단맛, 당근과 셀러리의 풋내가 연금술사의 솜씨로 교묘히 섞여 나는 주술에 걸린 것처럼 접시를 비웠다. 극도의 포만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마침내 식사를 마치고 식당의 좁고 긴 홀을 걸어 나올 때, 완벽하게 옷을 차려입은 남녀 여럿이 앞쪽에서 보였다. 그들은 사슴이 걷는 듯 안쪽 방으로 스쳐 지나갔다. 우버를 잡아 호텔로 돌아오며 이 도시의 이름을 되뇌었다. 밀라노. 이 차갑고 영민한 도시는 여전히 속마음을 숨긴 채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동현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 회사를 다니다가 훌쩍 영국의 요리 학교 탕트 마리Tante Marie로 유학을 떠났다. 호주의 레스토랑에서 늦깎이 셰프로 요리 열정을 불사르며 일했다.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으며, 지금은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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