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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의 이국 식탁

2018년 3월 19일 — 0

금천동의 한 작업실. 음악가 하림이 헝가리에서 만난 운명의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키우는 화분처럼 흙 아래 단단히 뿌리내린 그의 일상을 엿보았다.

굴라시에 얽힌 사연
고백하건대 그와의 만남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 섭외 전화를 걸었던 때가 지난해 8월쯤이니 거의 반년 만에야 인터뷰가 성사되었던 것이다. 음악가 하림은 10년 이상 진행해온 ‘기타 포 아프리카’ 프로젝트와 2018 평창문화올림픽 ‘아트드림캠프’의 일환으로 자주 해외를 오갔고 최근에는 JTBC 예능 프로그램 <비긴어게인 2> 촬영차 포르투갈과 헝가리에 잠시 머물다 왔다. 어렵사리 잡은 촬영일은 그가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평일 오후였다. 이제 막 장거리를 봐온 듯 퉁퉁한 비닐봉지를 양손에 쥔 하림과 계단에서 마주쳤다. “앗, 같이 들어가시죠.” 작업실 문이 열리고 그의 가지런한 세계가 살며시 드러났다. 망치로 툭툭 두들겨 맞춘 목재 선반장과 꺼뭇하게 손때 묻은 책과 카메라, 매끈한 실루엣의 피아노, 짙은 잿빛의 화목 난로. 그리고 한 켠에는 자그마한 주방이 자리했다. 들어오자마자 장작더미를 화구 안에 넣어 불부터 때더니 난로 위에 귤 8개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금방 공기가 훈훈해질 거예요. 혹시 귤 구이는 드셔보았나요? 귤을 구우면 껍질의 탄 향이 과육에 스며들면서 더 맛있어져요.” 귤을 굽는 광경은 난생처음 보았다. 고구마처럼 호호 불어가며 먹는 귤이라니. 왠지 모르게 ‘하림다운’ 간식이다. 오늘의 메인 요리도 그에 못지않다. 소고기와 채소, 향신료를 넣고 매콤하게 끓인 헝가리의 전통 요리인 굴라시(헝가리어로는 구야시Gulyás)다. 바로 얼마 전 헝가리에서 여러 번 먹은 음식이기도 하지만 사실 굴라시와의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 악기 만드는 장인의 집에 묵으며 악기를 배운 적이 있어요. 그의 아들이 오랜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주인아주머니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이걸 준비하더라고요.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해요.”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김치찌개 같은 집밥의 상징이랄까. 그러나 이때만 해도 굴라시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방송차 방문한 헝가리에서 본토의 맛을 경험하고 나서야 마침내 흩어진 퍼즐 조각들이 맞춰졌다. ‘아, 내가 그때 독일에서 먹었던 요리가 바로 이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대학원 강의 시간에 월드뮤직의 교재로 삼는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커다란 솥에 굴라시를 끓여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몇 번이고 스쳐갔던 상대를 사랑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린 것처럼, 운명의 음식을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저는 파프리카 가루 대신 고춧가루를 넣어 한국식으로 얼큰하게 끓여요.” 이제는 그만의 레시피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두툼하게 썬 채끝살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는 것으로 요리가 시작되었다.

삶의 동선을 바꾸는 일
그는 본래 맛집에 관심도 없고 음식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지금도 맛집은 찾아다니지 않는다). 요리다운 요리를 처음 해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어느 갤러리의 오프닝 파티 음식을 덜컥 맡은 것이 발단이었다. 최대한 조리에 손이 덜 가고 빠르게 서빙할 수 있으면서 보기에 근사하기까지 해야 하는 메뉴가 필요했다. 한 손에 집어 먹기 좋은 핫도그와 꼬치 샐러드를 준비하고, 어묵탕과 뱅쇼는 들통에 끓였다. 결과는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성공적이었다. ‘어라? 생각보다 잘하는데?’ 요리라는 의외의 분야에 소질을 발견하면서 점차 재미를 들였다. 지금까지도 집에서 아침 준비는 항상 그의 몫이다. 꽤나 공들여 부모님께 서양식 요리를 차려드린다. “기분이잖아요. 하루에 한 끼 딱 한 번, 식구들이 다 함께 모여서 가장 수다스러운 시간인걸요. 이때 기분을 안 내면 언제 내겠어요.”
하림에게 2012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다. 당시 홍대 작업실에서 떠나는 과정을 기록해보자는 취지로 진행한 ‘도하 프로젝트’는 그가 문화 기획자로서 제대로 ‘놀아본’ 첫 번째 작업이었다. 이를 계기로 문화 기획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는 한편, 부모님과 한집에 살면서 살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대충 끼니 때우시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활 속에 사소한 습관들을 다시금 새겨갔다. 식후에 차를 마시는 습관이나 음식을 반찬통이 아닌 그릇에 담아내는 일들이 익숙해지도록 부단히 애를 썼다. 그는 무엇보다 일상을 잘 정돈하고 싶었다. “사실 행복은 느린 데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선택적으로 천천히 살자는 신념을 갖고 있죠.” 그 일환으로 푹 빠져버린 취미가 화분 키우기다. 하루하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애타게 조금씩 자라나는,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식물들을 살피는 일. “다른 존재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잠시나마 피곤한 인간사를 벗어난 기분이 들어요.” 그의 계절은 식물의 성장에 맞춰 천천히 흘러간다. 매일 아침 식사를 성실히 준비하는 것도 느리게 살기 위해 일부러 확보해둔 시간이다. “일상을 부드럽게 유지하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은 단순한 기쁨과는 조금 달라요. 휴가를 떠나거나 돈을 벌었을 때의 만족감을 뛰어넘어서는 어떤 벅차오름이 있어요.” 그가 삶의 동선을 바꾼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변화하기 위해 아등바등 발끝을 세워 조금씩 나아간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순간에 답을 얻기도 했다. 집에서 해와 바람이 가장 잘 드는 위치에 식물을 두려고 보니, 청소용 도구와 재활용 쓰레기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왜 가장 좋은 장소에 이런 짐을 두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그 자리를 화분에 내주었다. 그러자 변화가 생겼다. 식물을 돌보기 위해 가까이에 방석을 두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니 화분 주변으로 좋아하는 물건들이 쌓여갔다. “한 평도 되지 않는 그 공간이 집에서 가장 건강한 곳이자 제가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더라고요.” 화분의 흙과 잎의 상태를 살펴 물을 주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속옷과 수건을 단정하게 개어놓는 일. 이 모든 것이 그가 일상을 단단히 지켜가는 방식이다.

삶의 배경이 된 음악
하림의 앨범 목록에는 의아한 구석이 있다. 그는 2001년 1집 앨범 <다중인격자>로 데뷔하여 2004년 2집 <Whistle In a Maze>를 발표한 이래 14년이 넘도록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출국’, ‘난치병’ 등의 명곡들이 단 2장의 앨범 안에 수록된 것이다. 3집 계획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겠지만, 모르는 척 한번 던져보았다. “그저 ‘죄송합니다’ 정도로 답하지만 제가 음악가로서 소홀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음악가가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그의 삶은 현재로서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앨범만 내지 않을 뿐 끊임없이 곡을 쓰고 연주하고 노래하며 공연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에게 앨범을 내줬으면 하는 팬들의 바람은 가요계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라는 요청처럼 들려요.” 가요계 안으로의 진입 여부가 인생에서 중요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앨범이나 가요 산업의 문제를 떠나 음악은 그의 삶의 전부가 아닌 배경음처럼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악기를 굳이 차에 싣고 다녔어요. 술을 마시다 흥이 오르면 악기를 꺼내 즉흥적으로 연주하곤 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악기를 항상 들고 다니는 모습이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세계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도 회의를 느꼈다. “특이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이 결국 예술가로서의 콤플렉스를 말해주는 것 같았달까요.” 삶에서 차지하는 음악의 비중과 그 당위성에 대해 의심을 해보고 집착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자연스레 편안해졌다. “지금 이 정도의 볼륨이 딱 좋은 것 같아요.” 작업실에 흐르던 음악은 말소리를 거스르지 않는 정도로 귓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음악가로서 감당하고자 하는 무게일지도 모른다. “일이 곧 나의 자아이자 소명이라는 생각이 꼭 정답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냥 ‘즐겁게 하자’는 정도로 타협하고 싶어요.” 이제는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그의 말엔 언뜻 허무주의가 비쳤다. 그러나 이는 대상에 깊이 잠겨본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감상일 것이다. 그는 삶에서 일을 덜어내고 남은 영역을 더욱 바지런히 보살폈다. 실은 그쪽이 더 어려운 일이리라. 문득 박민규 작가의 소설 <더블>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림은 ‘알아도 열심히 살아간다’. 인생의 무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성의를 다하는 것. 허무 뒤에 절망이나 냉소가 아닌 작은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것. 삶의 아름다움이란 그런 틈 속에서 맺히는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정성 들여 끓인 굴라시 한 숟갈을 입에 넣은 순간 그가 말한 행복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edit 이승민 — photograph 이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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