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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인문학 @박영순

2018년 3월 18일 — 0

나 자신의 소중함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커피는 인문학이다.

text 박영순

드립커피
드립커피

커피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생각할수록 느낌이 묘하다. 누군가 커피의 향미를 즐기는 것이냐, 아니면 향미를 감상하는 행위를 누리는 것이냐를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힘들다. 왜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것일까?
커피를 처음 만난 것은 여섯 살쯤으로 기억된다. 1972년도쯤이겠다. 선친이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던 터라 집에는 손님이 잦았다. 어머니는 접대용 음료로 홍차와 커피를 주로 내놓으셨다. 어머니는 홍차와 커피를 식혜와 수정과보다 귀하게 여기신 것 같다. 커피 한 잔이 만들어지는 장면은 마술과 같았다. 어머니는 병에서 2스푼 정도 진한 커피 가루를 꺼내 잔에 담고 그 위에 각설탕을 2개 올리셨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잔의 ¾가량이 차도록 붓고 휘휘 저으며 커피와 설탕을 녹였다. 마술은 지금부터다. 커피 자리에는 항상 간장 종지만 한 작은 그릇에 모락모락 데운 우유가 담겨 있었다. 하얀 우유가 검은색 커피 용액에 섞여 들어가는 모습은 악마가 하얀색 스카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즈음 커피의 향기는 그윽하게 바뀌었다. 병에 담긴 커피 가루의 냄새는 어린 나에게는 유쾌하지 않았다. 흙이 묻은 칡뿌리와 할아버지 곰방대, 그리고 뒷집 철봉이네가 키우던 소의 마른 여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르는 듯했다. 이런 커피가 우유를 만나는 순간, 부드러워지는 모양도 모양이거니와 향기가 완전히 다르게 바뀌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면 악마가 천사가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우유는 종종 홍차가 담긴 잔에도 부어졌지만, 그 잔에는 악마가 없었기 때문인지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다. 해 질 녘 뒤뜰에 내걸린 여동생의 기저귀에 비치는 노을처럼 경계가 밋밋하다는 인상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고는 했다. 그리고 커피와 얽힌 추억을 만든 것은 10여 년이 지난 대학교 도서관이었다. 오후 1시쯤이면 휴게실의 커피 자판기 앞은 4~5명이 줄을 설 정도로 붐볐다. 도시락을 까먹고, 특히 날이 추워 컵라면에 밥이라도 말아 먹은 날이면 달달한 커피 한 잔이 더욱 그리웠다. 김치나 장아찌 등 반찬 냄새를 없애기 위해 식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은 85학번 아이들에게는 제법 사치스러운 에티켓이기도 했다. 군대에 가선 커피를 취향에 맞춰 다르게 즐기는 세계를 경험했다. 제법 악명 높은 조교로 이름 떨치던 나는 점심시간에는 종종 부드러운 바리스타로 변신해 ‘커피특임’을 수행했다. 많은 조교들 가운데 “박 일병이 타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유쾌하기까지 했다. 단장 부속실의 커피 캐비닛은 점심때면 중령 이하 장교들에게도 개방됐다. 내 커피가 맛있던 비결은 간단했다. “정 중령은 2-0-2, 나 소령은 2-2-3, 문 소령은 2-2-2, 이 대위는 2-1-0” 마시는 사람에 따라 커피-설탕-크림의 비율을 달리해 기호를 맞춘 게 전부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다면 인스턴트커피일지언정 최고의 커피가 된다. 커피의 향미를 평가하고 묘사하는 커피테이스터Coffee Taster로서 행복을 누리기까지는 그 후 적잖은 과정을 거쳤다. 와인, 위스키, 차, 맥주, 사케 등 식음료 분야를 취재하고 공부하면서 커피를 다시 만난 것은 2009년이었다. 식음료의 맛은 재료가 자란 땅과 기후, 재배자의 열정에 달렸다는 ‘테루아Terroir의 진실’을 경험한 뒤 다시 만난 커피는 단숨에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커피는 나에게 더 이상 달달함만을 주는 음료가 아니었다. 한 잔의 좋은 커피를 대하는 것은 고매한 인품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반갑다. 좋은 커피는 나의 관능을 괴롭히지 않는다. 과일과 같은 산미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단맛과 동글동글 기분 좋은 질감은 나의 정신과 태도를 어느 한구석 모나지 않도록 매만져준다. 목으로 넘겼을 때 떠오르는 다크 초콜릿의 뉘앙스와 홍차를 연상케 하는 개운함은 매사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한다는 선비의 가르침을 닮았다. 이런 행복을 선사하는 커피를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좋은 친구를 잃는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커피를 만나면 반드시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커피에게 이름은 되도록 농장까지 추적되는 구체적인 재배지이다. 품종과 수확한 날짜, 가공 방법을 아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성장 과정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됨됨이’ 같은 것이다. 소비자들이 먼저 이런 정보를 제공자에게 요구하며 커피를 가려 마셔야 한다. 이 같은 노력은 사회 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운동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관능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좋은 커피가 주는 축복 중 하나는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소중해짐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목을 타고 들어와 곧 나의 일부가 되는 커피는 나를 돌아보는 명상으로 이끈다. “행복이란 자기의 영혼을 훌륭하다고 느끼는 데 있다”고 말한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조제프 주베르Joseph Joubert는 분명 커피 애호가였을 것이다.

박영순은 커피비평가협회(CCA) 협회장이다. 커피의 향미를 평가하고 묘사하는 커피테이스터로서 커피 분야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2017년 세계인명사전인 <마르퀴즈 후즈 후>에 등재됐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커피인문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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